
"그들은 관세를 낮추려고 돈을 냈습니다. 그 돈 일부가 이 사업에 들어갑니다."
한국 시간 10월 1일 새벽,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알래스카의 댄 설리번 상원의원을 옆에 세운 채, 한국이 알래스카 LNG에 약 540억 달러, 미국 원전 8기에 1200억 달러, 텍사스 가스발전소에 220억 달러를 넣는다고 발표했죠. 그리고 이렇게도 덧붙였습니다. "이 에너지 사업들은 전부 내 것(all mine)"이라고요.
그런데 같은 날 아침 산업통상부가 공개한 김정관 장관의 발언(9월 22일 비공개 브리핑)은 정반대였습니다. "알래스카 프로젝트는 우리 입장에서 할 타당성이 없다." 한쪽은 이미 돈이 들어간다고 말하고, 다른 쪽은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업을 두고 이렇게 다른 문장이 나온 이유를, 발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따라가 보겠습니다.
"돈을 냈다"는 말이 바꿔 놓는 것
트럼프의 발언을 순서대로 보면 이렇습니다. 한국과 무역협정을 맺었고, 한국은 수천억 달러를 투자해야 하며, 자신이 관세를 15%로 낮춰 줬다. 그 대신 한국이 돈을 냈고, 그 돈의 일부가 알래스카로 간다.
이 문장 구조에는 교묘한 점이 있습니다. '투자하기로 약속했다'가 아니라 '이미 값을 치렀다'로 말하는 순간, 알래스카 LNG는 새로 협상할 사업이 아니라 이미 계산이 끝난 거래의 일부처럼 들리게 됩니다. 듣는 사람 머릿속에서 질문이 "할까 말까"에서 "언제, 얼마나"로 넘어가 버리는 거죠.
실제 사정은 다릅니다. 한국 정부는 9월 22일 국회에 텍사스 발전소만 1호 사업으로 보고했고, 원전과 알래스카 LNG는 상업성을 더 따져 봐야 하는 사업으로 분류해 두었습니다. 10월 1일 아침 발표한 계획에서도 알래스카는 '당장 할 사업'이 아니라 '추가 검토 대상'이었고요. 돈은 아직 알래스카로 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던진 숫자가 기준이 된다
김정관 장관의 브리핑에는 흥미로운 숫자가 하나 더 있습니다. 미국이 처음 한국에 제시한 알래스카 투자 금액은 약 670억 달러였다고 합니다. 이걸 다 받아들이면 한국이 약속한 전략투자 한도 2000억 달러를 넘어가서, 정부는 금액을 줄이는 쪽으로 협상 중이었습니다. 장관 스스로는 사업 규모를 500억~600억 달러 정도로 봤고요.
그런데 트럼프는 540억 달러로 발표했습니다. 협상에서 먼저 숫자를 공개하는 걸 흔히 닻 내리기(앵커링)라고 부릅니다. 처음 들은 숫자가 기준점이 되면, 이후 이야기는 그 숫자에서 얼마나 깎느냐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670억에서 540억으로 내려온 숫자를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못 박으면, 한국이 "사실 우리는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할 여지는 그만큼 좁아집니다.
카메라 앞의 선언은 되돌리기 어렵다
여기에 공개 선언이라는 무게가 더해집니다. 미국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카메라 앞에서 발표한 내용을 뒤집으려면 상대국 정부가 "그건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동맹국 입장에서 그 한마디는 부담이 크죠. 먼저 발표한 쪽은 반대가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얻는 셈입니다.
SBS는 지난해 맺은 MOU와 한미 전략투자 특별법 구조상 투자 사업을 미국 대통령이 '양국 협의를 거쳐' 고르게 되어 있어서, 이런 일방적 발표를 막기가 애초에 어려웠다고 짚었습니다. AP도 한국 정부가 이 사업을 얼마나 빨리 승인할지, 얼마를 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썼고요. 발표는 끝났지만 합의는 아직인, 기묘한 상태가 만들어진 겁니다.

"전부 내 것"은 누구에게 한 말일까
트럼프가 이 사업들을 두고 "all mine"이라고 한 대목은 한국보다 미국 유권자를 향한 말로 읽힙니다. 11월 중간선거에서 알래스카 상원 선거는 민주당 메리 펠톨라 후보와 설리번 의원이 접전을 벌이고 있고, 여론조사 평균으로는 설리번이 46.5% 대 45.0%로 조금 뒤져 있습니다. 원전이 들어설 오하이오와 사우스캐롤라이나도 격전지로 꼽히죠.
그러니 이 발표에는 청중이 둘입니다. 알래스카 유권자에게는 "50년 묵은 가스관을 내가 해냈다"는 약속이고, 한국 정부에게는 "이미 발표됐다"는 압박입니다. 트럼프가 일본과 EU, 한국이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돈"을 미국에 넣는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숫자가 클수록 유권자에게는 성과가 되고, 상대국에게는 물러서기 어려운 약속이 됩니다.
한국이 붙들고 있는 기준
그렇다고 한국 쪽 말에 힘이 없는 건 아닙니다. 김정관 장관은 "전략적 이익이 있어도 상업적 합리성이 없으면 안 한다"고 선을 그었고, "상업적 합리성이 떨어지는 것은 미국도 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인허가 지연, 노동력, 날씨, 기술 문제를 하나씩 따져 보겠다고 했죠. 실제로 엑손모빌과 BP 같은 석유 메이저들은 수익성을 이유로 이 사업에서 빠졌고, 서울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도 자기 대미 투자 목록에서 이 사업을 뺐습니다.
다만 한국에도 이 사업을 완전히 밀어내기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장관은 가스 도입 경로가 카타르·호주·말레이시아처럼 특정 지역에 몰려 있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호르무즈·말라카 해협 같은 길목 위험을 생각하면 태평양 건너 알래스카는 매력적인 선택지이기도 하죠. 여기에 지난해 11월 공동 팩트시트에는 관세 인하와 투자 약속,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이 한 문서에 함께 담겼습니다. 한 묶음으로 시작된 거래에서 한 조각만 딱 잘라 거절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선언과 계약 사이
결국 지금 벌어지는 일은 선언과 계약 사이의 줄다리기입니다. 트럼프는 선언으로 기준점을 옮겼고, 한국은 "상업적 합리성"이라는 계산서를 들고 버티고 있습니다. 가스관은 발표문이 아니라 돈과 철과 알래스카의 겨울을 이겨야 지어지니까요.
앞으로 뉴스에서 볼 것은 540억 달러라는 숫자가 아니라, 계약서에 어떤 조건이 적히느냐입니다. 한국가스공사가 얼마에, 얼마나 가스를 받기로 하는지, 공사비가 불어나면 누가 떠안는지, 수익은 어떤 순서로 나누는지. 그 칸이 비어 있는 한, 트럼프의 "돈을 냈다"는 말은 아직 절반만 사실입니다.
먼저 크게 말한 쪽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일수록, 던져진 숫자 말고 내가 정해 둔 기준으로 다시 계산해 보는 쪽이 오래 버팁니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이 보여 줘야 할 것도 결국 그 기준이겠죠.

참고한 자료
- Trump announces $54 billion South Korean investment in Alaska natural gas pipeline - PBS NewsHour(AP)
- 트럼프 "이번 투자로 에너지 공급망 확보·한국과 파트너십 강화" - 뉴스핌
- 김정관 "알래스카 LNG, 우리 입장서 타당성 없어…상업성 따져볼 것" - 뉴스핌
- 트럼프 "한국, 알래스카에 LNG 투자" 일방 발표 - 한국일보
- Trump Directly Announces S. Korea's U.S. Investment Plans - SBS
- 선거 급한 트럼프, 협의 안끝난 韓투자금으로 격전지 표심 공략 - 파이낸셜뉴스
- 일본도 발 뺀 '동토 가스관' - 서울신문
- U.S. approves South Korean nuclear submarine program in finalized trade deal - UPI